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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J. 크로닌(JOHN J. CRONIN) 2)
james 14-04-16 16:28 2,574 hit
J. 크로닌(JOHN J. CRONIN) 2)
 
 
PADI의 탄생
나는 나우이와 코스를 하고 싶어 했다. 밥 클로는 마콤의 서부 일리노이 대학에 스탭으로 있었고 코스를 조직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장비에 관한 강의를 해주도록 하고, US 다이버스에게 저녁 뷔페를 무료로 제공하도록 부탁 할 것을 제안했다. 나의 보스는 동의했다. 그러나 나우이 사람들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상당히 창피했다. 30명의 사람들이 이미 등록했고 호텔방을 이미 예약했다. 나는 회의장을 이미 확보해 둔 상태였다. 나는 랄프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어 비행기를 타고 그를 만나러 갔다. 스카치 한 병을 사 들고 나는 그에게 “우리는 항상 무언가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해 왔지. 이제 함께 한번 해 보자구” 우리는 밤새 그곳에 앉아 술병을 완전히 비우며 우리의 계획을 만들었다.
 
우리는 중서부의 강사들과 함께 만나 호텔에서 2일간 묵으며 8주 코스의 아웃라인을 만들었다. 이를 정리정돈 한 것은 랄프였다. 우리는 파트너가 되었다. 나는 관리를 하고 그는 아카데미를 맡았다. 랄프 이야기로는 PADI라는 이름은 내가 과음해서 아일랜드식 줄임말을 원해서 생각해 냈다고 한다. 우리는 뭔가 주목을 끄는 이름을 찾고 있어서 PADI는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프로페셔널”이라는 단어에 합의를 보았다. 우리는 발간물로서 언더씨 저널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나는 이 이름을 고아원에서 발간되는 인베스터스 저널에서 따왔다.
 
미화 30달러가 PADI에 부은 우리의 창업 투자금 이었다. US 다이버스의 내 상사는 시간 낭비라고 말했지만 일에 방해가 되지 않고 PADI를 본인의 회사와 따로 분리된 상태로 유지한다면 해도 된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자격증을 발급할 것인지 생각해 내었다. 일 년에 15달러를 회원비로 책정하고 카드 발급비로 2달러를 부과했다. 1967년 즈음에는 아주 능률적이 되어서 7개주를 여행하던 나는 중서부에서 아주 크게 부상하게 되었다. 나는 일리노이의 나일즈의 내 집 지하에 오피스를 마련했다. 주말에 나는 자격증 카드 발급을 했는데 나는 독서 장애가 있어서 이름 철자에 실수를 많이 했다. 결국 파트타임 비서를 채용해야 했다.
 
1968, 나는 랄프에게 말했다. 돈을 벌어야 한다. 필름페스티벌을 열자. 우리는 레인 텍(Lane Tech) 고등학교에서 언더씨 포럼이라는 것을 열었다. 연설자는 주로 중서부 사람들 이었다. 우리는 이를 몇 회 더 실시했고 2000달러를 벌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처음으로 번 돈이었다.
 
1969년에 나는 US 다이버스의 서해안 마케팅 및 판매 디렉터로 와 줄 것을 제안 받았다. 시카고의 내 후임은 짐 매키스미스였다. 그는 해리 샹크와 함께 다음해 우리의 페스티벌을 진행했고 이를 Our World Underwater라고 지었다.
 
PADI 캘리포니아로 이동하다
1969년 말 내가 이사하게 되었을 때 PADI를 랄프에게 맡겼다. 그 당시 US다이버스에 대격동이 있었다. 그들은 회장 짐 캐롤을 해고했다. 나는 우리 새집을 저당 잡혔다. 3 5천 달러, 내 평생에 보아온 돈 보다 훨씬 많았다. 엄청난 실수였다.
 
나는 학교에 간 적도 없지만 사람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나를 실행 부회장과 총지배인으로 삼았다. 대차대조표를 읽어본 적도 없다. 2일에 걸쳐 회의를 가졌는데 나는 위원회에게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들은 “당신은 이미 알고 있어요. 곧 알아낼 거예요” 나는 아주 좋은 팀을 그곳에 배치했고 아주 잘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산업 다이빙과 소방관, 그리고 안전 장비까지 늘려 나갔다.
 
71년 후반에 랄프는 가르치고 코치하는데 너무 바빠서 PADI를 돌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PADI를 이곳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나는 코스타 메사의 17번가에 오피스를 발견했고 쥬니 넬슨이라는 여성을 고용했는데 그녀는 PADI의 첫 고용인이 되었다. 나는 US 다이버스 일로 무척이나 바빴고 PADI를 잘 돌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닉 이콘을 고용했다.
 
닉 역시 US 다이버스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그의 주 관심사는 가르치는 것이었다. 나는 랄프와 함께 글쓰기를 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닉은 매니저로서 3년 동안 매뉴얼에 착수했다. 우리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고 우리는 진보적이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접근법을 좋아했다.
 
PIC PADI가 혁신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수입을 안겨주었다. 이는 폴 찌모울리스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자격증에 사진을 붙여서 발행해 주는 기관이 있다면 엄청나게 잘 나갈 것이라고 했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물으니 그는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강사들에게 물으니 그들은 10명의 학생들을 사진 때문에 쫓아다닌다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PIC봉투를 고안해 냈다. 우리는 이것을 강사들에게 주고 강사는 그의 번호를 그 안에 기입하고 학생들에게 주어 보내게 한다. 이는 우리에게 엄청난 큰 힘이 되었다.
 
PADI 사람들
소나 위스난드는 닉을 따라왔다. 그녀는 아주 조직적이었다. 모든 여성들을 관리하였고 훌륭한 원고 정리가 였다. 그녀는 쇼를 주관했고 매일처럼 공공과 산업계에 우리를 알렸다. 그는 정말로 훌륭한 운영 매니저였다. 닉이 떠나고 데니스 그래이버가 훈련 디렉터로서 들어왔다. 데니스는 PADI의 훌륭한 특사였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였고 랄프와 가까이 일했다. 아주 훌륭한 연설가이기도 해서 그는 대사로서 PADI의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70년대 후반에 알 혼스비, 제프네들러, 알렉스 브라일스키 그리고 많은 젊은 터키 사람들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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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The Encyclopedia of Recreational Diving(PADI), Diving Knowledge Workbook(PADI), 코스디렉터 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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