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에릭슨(RALPH ERICKSON)
* PADI의 공동 설립자 (존 크로닌과 함께)
* 스페셜티 코스들의 개념을 발전시킴
* 시카고 지역의 선구자적인 다이버이자 강사
* 로얄라 대학에서 24년간 수영 및 워터 폴로 코치
* 2차 세계 대전의 낙하산 부대원으로 전투에 참가한 후 시카고 파크 디스트릭트의 라이프 가드로 1950년대에 스쿠버를 접함.
“나는 다이빙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우리가 처음 다이빙 시작했을 때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베브 모르간 (Bev Morgan)의 책은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환상적인 것으로 아주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베브에게 다이빙을 베브의 책에서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재능의 4분의 1 만큼 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당시 많은 강사들처럼 랄프는 자신의 자격증 카드를 발급하고 있었습니다(에릭슨 언더 워터 다이빙 스쿨),
“나는 1961년에 모르간의 책과 비슷한 종류의 책을 데몬 메뉴팩처링 회사를 위해 썼다. 그들은 그들의 레귤레이터와 함께 팔려고 했는데 책이 나오기 전에 폐업하고 말았다. 나는 책을 가르치는데 사용하고 1961년 휴스톤의 나우이 클라스에 처음으로 참가하기 까지 그렇게 해 왔다. 모두 65명이 있었고 내 강사번호는 35였다. 나는 시카고 지역에 YMCA가 아닌 강사로는 유일했다. 나는 돈을 더 많이 벌기 원했고 내 레벨을 올리기 원했다. 나우이는 강사 훈련 코스를 중서부에서 실시해 주지 않았다. 동해안쪽 아니면 서해안 쪽에서만 했다. 이 상태가 4-5년 동안 지속 되었다”
PADI 공동 설립
“존 크로닌(당시 US 다이버스의 중서부 판매 대표)이 전화를 해서 나우이 코스를 서부 밀리노이 대학에서 개최할 거라고 말해 주었다. 나우이가 그에게 장비에 관한 강의를 하도록 부탁해서 그는 장비를 차에 싣고 운전해 갔는데, 편도 1차선으로 모든 농부들이 시간당 20마일로 운전하여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드라이브였다고 했다. 존은 그곳에서 전화를 했다. 아무도 코스에 오지 않아서 코스가 취소됐다고 했다. 크로닌은 에릭슨과 만나게 되었다. 존이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로 들어와 이야기했다”
“시간이 되었어!”
나는 “무슨 시간?”
“새로운 단체를 만들 시간이 되었다구!”
나는 “좋아! 존! 이름이 있어야 되는데“
존은 ”랄프, 이름에 프로페셔널만 들어간다면 뭐든지 상관없어“ 였다. 바로 내 귀가 번쩍했다.
“나는 프로페셔널한 교사지!”
“이제 말이 좀 되는군!”
“좋아! Professional association of Dive Instructors" 존은 ”PADI" 하고 반복했다.
“나는 항상 그가 아일랜드 출신이기 때문에 PADI라고 이름 지었다고 항상 놀렸다. 그러면 그는 내가 이름을 지으면 바이킹이나 뭐 그런 스웨덴 말이 될 거라고 했다”
에릭슨은 PADI 로고를 기계를 이용한 그림 도구로 도안해냈지만 다이버를 그려 넣는데 예술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가랑 함께 점심을 먹으며 얼마나 가격이 드는지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는”강사 자격증을 주면 어때요?“ 그것이 처음으로 탄생한 PADI 로고였다. 2년 후 우리는 몇몇의 PADI 강사들에게 전화를 받았는데 프로페셔널의 철자가 틀렸다는 것이었다. 돌아가 확인해보니 프로페셔널에 ”e"가 빠져 있었다. 이제까지 2년 동안 그렇게 틀린 철자를 사용했었다. 이 일로 겨우 우리는 철자를 고칠 수 있었다”
자격증 단계
“우리는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단계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유자격 다이버, 어드밴스 다이버, 그리고 그 후에는 시니어 다이버 이렇게 이름을 붙일 생각이었다. 또 마스터 다이버, 보조 강사 그리고 강사 레벨을 둘 생각이었다. 존은 이를 프랭크 스칼리에게 보여주니 프랭크는 해군에서 마스터 다이버라고 있으니까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맞는 말이군. 그럼 약간 바꿔서 다이브마스터라고 하지.” 이는 모든 것의 융통성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다이브마스터라는 단어는 돌고 있었으나 누구 한 사람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를 위한 기준을 세워야 했고, 결국 우리는 마스터 다이버를 만들고 다이브마스터를 그 수에 삽입했다”
스페셜티 코스들
“당시에 스페셜티 코스를 이미 생각했었다. 난파선 다이버, 야간 다이버, 수색과 인양, 이름은 이미 있었는데 이를 스페셜티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닉 아이콘이 이 용어를 찾아내어 스페셜티라고 부르고 데니스 그레이버가 이를 더욱 한 단계 발전시켰다. 수영에서도 단계가 있다. 보이스카우트도 그렇고 스케이트 역시 그렇다. 거의 모든 단체는 사다리가 있고 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이빙 세계에서 이는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하지만 이는 1980년대 어드밴스드 프로그램이 잘 진행되기 전까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이것이 아이디어와 통합되고 강사의 정신에 파고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PADI가 생기기 전가지 오직 1회의 개방 수역 다이빙으로 자격증을 받았다. 에릭슨은 이것을 5회로 늘렸습니다(현재 스쿠바몰의 진행프로그램은 4회)
“1971년과 72년에 로얄라 대학의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2회 다이빙을 했었다. 한 18살짜리 학생이 찢어진 바지와 스쿠버를 착용한 체 나에게 말했다. “버디를 잃어 버렸어요!” 나는 18미터로 내려가 그의 버디를 찾았다. 그는 바닥에서 얼굴을 위로하고 누워 있었다. 물론 이미 죽어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 곰곰이 생각했다. 그 때 나는 자격증을 주기 위해서는 5회 다이빙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더 이상 “테스트 다이빙”이 아닌 훈련 다이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PADI에서는 오늘날까지 훈련 다이빙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드밴스드 코스
“한 남자가 전화를 해서(그는 일 년에 35만 불을 벌었다) 물어보기를 “3년 전에 다이빙 코스를 했는데 그 다음에 한 번도 다이빙을 안 했어요. 다시 다이빙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물론이죠! 그렇지만 지금은 5회 다이빙을 해야 돼요! 그는 가격을 물었다. 나는 “100달러” 하고는 숨을 죽였다. 그는 쾌히 승낙했다. 우리는 5회의 다이빙을 마쳤고 그에게 자격증을 주었다. 그는 “다음 코스는 무엇이죠?” 하고 묻자 나는 “어드밴스드 다이버”라고 말했다(당시 PADI는 상당 기간 존재했지만 어드밴스드 오픈 워터 다이버를 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언제 시작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 다음날 우리는 에반스토 비치에서 만나 해변 끝까지 약 50야드를 걸었다. 나는 어드밴스드 오픈 워터 다이버에 대해 뭔가 생각해 내야 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생각해 냈다. 나는 “우리는 내추럴 네비게이션을 할 거예요. 여기 모래에 리플마크가 있죠. 이는 항상 해변가와 수평을 이루어요! 바깥쪽으로 10번 차고 나갔다가 다시 해변 가로 돌아오세요!” 그가 네비케이션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다음에 뭘 하지? 원을 그리자!” 그는 원을 완성했다. 똑같은 질문의 반복, “다음엔 뭘 하지? 삼각형 패턴! 다음엔?” 이는 내가 생각해낸 것 중에 걸작 중에 하나였다. 왜냐면 모두가 수색과 인양을 하려면 네비게이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다이빙은 나침반을 이용한 네비게이션을 했고, 세 번째는 야간 다이빙, 네 번째 다이빙은 레이씬 인공 호수에서 27미터까지 딥 다이빙을 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난파선 다이빙, 그 다음 코스는 무엇인지 물었다. 우리는 이미 시니어 다이버를 생략했기 때문에(NASDS에 시니어 다이버 코스가 있었기 때문에) 그 다음은 그래서는 안 되었지만 다이브마스터 코스로 바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어쨌건 우리는 그렇게 했다. 그는 다이브마스터 코스를 밟았고 그리고는 다음 코스는 물었다. 나는 “강사 코스”라 대답하고 우리는 ITC를 마치고 그는 강사가 되었다”
“1970년 즈음까지 오직 우리 두 사람만이 PADI를 운영했죠. 우리는 첫날부터 아주 확고했어요. 래인 텍 고등학교(시카고)에서 필름 페스티발을 열었고 쿠스토 역시 와주었죠. 존이 캘리포티아로 이주했을 때,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죠. 대신 해리 생크스가 YMCA로 가져가서 Our World Underwater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1969년에 크로닌은 US 다시버스의 마케팅 매니저가 되어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PADI 헤드 쿼터 역시 그를 따라 이동하고 닉 아이콘은 국립 훈련 디렉터로 고용되었다. 그 당시 나는 로얄라 대학에서 다이빙을 가르치고 있었죠. 나는 PADI가 성장 하려면 캘리포니아가 가장 적절한 장소라는 것을 알았어요!”
언더씨 저널
“나는 첫 번째로 발간된 모든 언더씨 저널에 글을 썼습니다. 각 아티클에 가짜 이름을 넣었죠. 그 이름 중에 하나는 우리 엄마의 결혼 전 이름이었는데 한 캐나다에 사는 남자가 전화를 해서 하는 이야기가 ”제 이름하고 같은데요, 혹시 친척일 수 있어서요!“ 하고 이야기 했다. 바로 나는 이것을 쓰레기통에 멀찍이 버릴 수 있는 만큼 버려 버렸다”
“Diving is Fun. 이것을 우리는 Psychology Today에서 얻었어요. 그들은 Fun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고 무엇인지 잘 보여 주었지요. 그 중에 하나는 어떤 것을 가지고 가장 간단한 형태로 조각조각 냅니다. 이를 하나를 맞추고 그 다음 것으로 진행해서 또 그것을 완성하고... 그러면서 사람들은 FUN을 느낍니다.”
“크로닌은 ‘프로페셔널’과 ‘세계’라는 말을 함으로서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어요. 그렇지 않았다면...내가 오직 관심에 둘 것은 미시간 호수와 서부 해안 밖에 없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