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J. 크로닌(JOHN J. CRONIN) 1)
· PADI의 공동 설립자이자 최고 경영 책임자(1928-2003)
· 전 US다이버스의 최고 경영 책임자, 회장
· 70년대에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반 다이빙 입법 조치에 반대 운동을 이끎
· DEMA의 전 회장
· 언더씨 저널(Undersea Joumal)의 발행자
· 국제 다이빙 산업계의 “Reaching Out Award"상 수상
· 2002년 “국제 스쿠버 다이버 명예의 전당”에 입당됨
시작
“나는 뉴욕 중앙 철도에서 선로공으로 일했다. 선로공은 철도를 놓는 사람이다. 이 용어는 인도에서 왔다. 나는 항상 많은 사냥과 낚시를 해왔고 뉴욕의 골드스톡이라 불리는 스포츠 가게의 단골이었다. 결국 그들은 나를 판매부원으로 채용했다.”
“레니 존스라는 이름의 손님이 들어와 아쿠아렁을 사고 싶다고 했다. 나는 ”대체 아쿠아렁이 뭐예요?“라고 물었다.
“이를 사용하면 물속에 들어갈 수 있어요.” 나는 “왜 물속에 들어가요?”하고 물었다.
레니는 나에게 US다이버스가 1952년에 매매된 용커스에 있는 아쿠아 건 회사의 브로셔를 주었다. 그들은 내가 세 개를 사면 딜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싫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레니는 계속적으로 나를 귀찮게 하여 나는 결국 3개를 샀다. 레니는 자기 것을 사서 자기 스스로 다이빙을 배웠다. 그는 계속 나에게 다이빙을 같이 가도록 강요했다. 골드스톡 가게는 나에게 나머지 두 개를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서 1954년에 나는 하나는 구입했다. 내 슈트를 직접 만들고 어떻게 다이빙을 하는지에 관한 16페이지짜리 소책자를 읽고 레니는 나에게 15분간 강의를 해 주었다. 우리는 조지 호수로 가 116피트로 내려가 나의 첫 다이빙을 했다. 우리는 벽 바로 옆에서 다이빙을 시작했는데 마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듯했다.”
US 다이버스
“15명의 우리 그룹은 결국 호수를 돌며 다이빙을 하거나 메사추세츠와 로데섬 바다에서 때때로 다이빙을 즐기게 되었다. 우리는 나름대로 제작한 8주짜리 코스로 2회의 시험 다이빙을 포함한 코스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는 골드스톡에 소속된 클럽을 통해 가르쳤다(자격증 없이: 당시에 자격증은 없었다). 이는 이 스포츠를 소개하고 장비를 판매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우리는 이 비즈니스를 크게 성장시켰다. 결국 도매 부문에 들어가게 되어 1959년 후반에는 우리가 US 다이버스의 두 번째로 큰 거래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1960년에 US 다이버스는 아쿠아렁 센터라 이름 한 오피스를 뉴욕에 열고 나에게 클라스를 가르치도록 했다. 나는 커넷티컷 웨어 하우스에서 소비자 서비스 대표로 일하는 친구와 친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폴 찌모울리스였다. 우리는 같이 지역 난파선에 다이빙을 가곤 했다. 1961년 중서부에서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나에게 시카고로 가 중서부 판매 대표가 되도록 요구했다. 나는 다이버들의 협회 파티에서 에릭슨을 만났고 우리는 곧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다이빙을 가르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의논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사람들을 쫒아내는 방식을 이용했고, 의사나 변호사건 상관없이 다이빙을 가르치기 전에 미시간 호를 먼저 수영할 수 있어야 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다이빙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쉽게 다이빙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랄프는 내 말에 동의했다. 우리는 가까운 시일 내에 무언가를 함께 시작하기로 약속했다.
홍보가 자동적으로 되고 있던 이 황금기에 사람들은 다이빙을 엄두도 못 내도록 쫓아내는 그런 훈련을 제공하고 있었다. 마이크 넬슨은 계속 재방송 되고 있고 쿠스토는 아주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다이빙 훈련은 어려웠고 편안하지 않았다. 그 당시 많은 다이버들이 탄생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다이버가 되는데 너무도 쓸데없는 것들을 많이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